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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최치원과 진성여왕, 기로에 선 선택

기사승인 2017.12.08  14: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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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세의 군주 진성여왕 최치원의 좌절

[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11월16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경희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가 수도권대상 “최치원과 진성여왕, 기로에 선 선택”이라는 주제로 시민강좌를 개최했다.

신라 천년왕국은 재해와 기근으로 헌덕왕 7년부터 도적들이 봉기하자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고 이듬해 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구자식을 팔아 생존하며, 도둑떼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여 임금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이렇게 재해와 기근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천년왕국 신라는 망국으로 국운이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흥덕왕 사후의 왕위다툼 개성(開成) 원년(서기 836) 병진에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시고, 물려받을 적장자가 없자 왕의 사촌동생 균정(均貞)과 다른 사촌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서로 왕위를 이어받고자 다투었다.
49대 헌강대왕때는 신라의 전성시대로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부잣집 큰 저택을 말함)이 있었다. “어법집”에 이르기를 산신이 춤울 추고 노래를 부르며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고 하였다”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사태를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므로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말함이다.

곧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계했던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여 향락에 너무 심하게 빠졌기 때문에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정강왕 2년 뒤을 이을 자식이 없이 누이동생 진성여왕을 세웠다.

진성여왕 2년(서기 888) 임금이 평소에 각간 위홍(魏弘)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임금은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주니 아첨과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해 기강이 문란 하였다.

AD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농민들 벌떼처럼 일어나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여왕 10년(896),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남들과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赤袴賊,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당나라 소종(唐昭) 경복(景福) 원년(서기 892)은 바로 신라 진성왕 6년인데,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은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건녕(乾寧) 원년(894)에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들어가니 무리가 3천 5백 명이 되어 14개 대오로 나누었다.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 경기 개성)으로부터 와서 의탁하자 곧바로 철원군 태수의 직위를 주었다.

진성여왕 11년(897) 여름 6월, 임금이 측근들에게 말하였다.“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그리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물려주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스승에게 학문을 배워 급제하여 자기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왕조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 천령군 부성군 등 태수로 역임했다.
진성여왕 8년(894) 최치원은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時務一十餘條)을 작성하여 이예 임금은 기쁘게 받아들여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최치원은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 어렵고 허물을 뒤집어쓰니 스스로 대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갈지 않고 강과 바다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자유로운 몸으로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주의 청량사 등 가족과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노년을 마쳤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저작권자 © 국제i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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