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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와 서아시아의 만남

기사승인 2017.12.13  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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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비아 상인들도 활로를 찾아 신라로 진출 예상

[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편찬에 참여한 집필진 중심으로 매주 화, 목 필자에게 직접 듣는 신라사 연재강좌를 개최했다.

지난 11월 23일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강원대학교 김창석 교수의 “신라와 서아시아의 만남이란 주제로 2시간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1. 이슬람인의 내왕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가 唐軍을 격파한 이후 당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 長安, 廣州, 泉州, 明州, 杭州, 揚州 등의 蕃坊에 무슬림들이 집주하고 있었다.
신라에 관해 기록한 9세기의 이슬람 문헌들은 이러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깐수(Qānsu)의 맞은 편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領主國들로 갈라져 있다. 그곳에는 金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나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븐 쿠르다드비, 『제도로 및 제왕국 안내서』

2. 페르시아인ㆍ소그드인의 진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중간 지역을 古來로 소그디아나(Sogdiana)라고 불러왔는데, 이 지역 오아시스 諸國 출신의 종족이 소그드인이다.
이들은 기원전부터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그리이스, 스키타이, 그리고 기원후에는 쿠샨왕조, 서돌궐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으며 7세기 중엽에는 唐의 서역 경영에 의해서 안서도호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사마르칸트(康國)와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를 중심으로 한 소그디아나 지역은 東西로 중국-서아시아-유럽을 잇고, 南北으로는 인도-북아시아 초원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여타 오아시스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관개농업과 목축을 하며 생활했고 그 과잉인구는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특히 원거리 교역에 특장을 보였다.
글씨를 잘 쓰고 장사를 잘 해서 작은 이익이라도 다툰다. 남자가 20세가 되면 교역을 위해 타국에 보낸다. 이들이 중국에도 오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그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소그드인들은 당에서 ‘商胡’ ‘興胡’로 불렸으며, 조공 및 互市 교역을 벌임은 물론 당 내지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활동했다. 그리고 당 이전부터 중국 내지에 자치적인 취락을 형성했다.
사마르칸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8세기 초, 그리고 8세기 중엽~9세기 중엽에 걸쳐 위구르(回鶻)의 지배를 받은 시기에도 오히려 동방에 분산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신라 유물 중에서도 皇南大塚 北墳과 天馬塚에서 출토된 유리잔의 컷팅 기법과 계림로 14호분 출토 金裝短劍, 그리고 여러 유물에 나타난 雙禽文과 連珠文이 페르시아 계통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인이 신라를 직접 내왕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본다.
주지하듯이 (안록산)安祿山의 아버지가 소그드인이었고, 顔眞卿도 원래 소그드계 성씨인 康氏의 인물로서 742년 당조에 귀부했다. 그리고 754년 鑑眞을 따라 일본에 간 安如寶도 소그드계 인물이었다. 安ㆍ康ㆍ石ㆍ史ㆍ曹姓은 소그드인이 중국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성씨였다.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掛陵과 興德王陵의 무인석상도 종래 서역인 혹은 아리안계 인물로 막연하게 추정했으나, 용모의 특징으로 지적되던 ‘深目髙鼻’와 풍성한 수염은 분명히 소그드인의 특징이다. 소그드인이 왕래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역시 그들을 모델로 하고, 당나라에서 활약하던 소그드 무인에 대한 견문까지 더해져 형상화된 것이 이들 무인상이라고 생각된다.

3. 아라비아인의 到來
쿠르다드비의 전언에서 9세기 이슬람 교도의 신라 정착이 운위되는 것은 바로 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페르시아인,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들이 신라에 진출하여 일부는 그곳에 정착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8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제종족의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며 8세기 후반 이후 중국에 渡航하는 서아시아 상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양주ㆍ소주ㆍ항주ㆍ명주ㆍ태주 지역은 신라인과 아라비아인의 거류지가 겹치거나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들 간의 교역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장안에 거류하던 아라비아인과 신라 사절단ㆍ유학생의 거래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장보고가 피살당하고 851년 청해진이 폐지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종래 신라 상인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동아시아 海上交易圈에 일시적으로 공백 상태가 조성되었고, 당ㆍ발해ㆍ일본 상인들이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이에 편승하여 신라로 진출했으리라 본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저작권자 © 국제i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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