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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 말 선종의 수용과 확산

기사승인 2017.12.13  19: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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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불교 문화를 인식시키고 지방 세력을 성장시키다

[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28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대상으로 신라사대계(新羅史大系) 편찬에 참여했던 집필자에게 직접 듣는 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경주대 한기문교수가 ‘신라말 선종의 수용과 확산’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논거를 제시하며 2시간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선은 인도의 속어 jhana에서 맨 뒤 모음이 탈락해 jhan이라고 발음되는 것의 음을 베낀 것으로 사유수(思惟修), 정(定), 공덕취림(功德聚林), 정려(靜慮) 등으로 번역된다.
당이 일어나면서 등장한 도신(道信)과 홍인(弘仁)은 호북성 기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들의 사제간 계승과 사상의 연속성으로 보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부를 수 있으며 후대 선종의 모태가 되었다.

선종 사원이 확보되는 경로는 첫째, 기존 종단인 화엄, 법상 등의 사원을 선종으로 전환시켜나가는 경우이다. 가지산사와 월광사 그리고 진구사, 화개곡의 사원, 대안사가 그러한 경우였다.
둘째, 터를 물색하여 창건하는 경우이다. 이는 쌍계사, 지실사, 법운사가 그러한 경우였다.
셋째, 지방세력의 원찰을 선종 사원화한 경우이다. 용엄사, 보현산사 등이 그 예이다.
넷째, 신라 王族의 원찰을 희사 받아 선종 사원으로 삼는 경우이다. 이는 성주사, 안락사, 심원산사, 석남산사가 대표적 예이다.
다섯째, 국왕의 교지로 기존 사원을 선종 소속으로 바꾸는 경우이다. 심묘사, 원향사, 실제사, 무량사, 영신사, 고달사 곡산사 등이 그러한 유형의 선종 사원이었다.

선종 사원이 확보되고 확산되는 데는 국왕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덕왕대부터 진성여왕대까지는 각 왕대에 선종 사원을 확보해준 사례가 다수 있었다.

신라 하대 역대 왕들은 선종 사원을 제공하거나, 국사로 예우하면서 국정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였다. 선종의 대중성, 집단성에 주목하고 정치적 배경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종 교단 역시 사원의 확보와 문도의 결속 및 유지를 위해 승탑을 건립하고 비문을 건립하려는 목적에 따라 국왕의 요청에 호응한 것이라 생각된다.

선승의 출신 배경과 교단의 기반
선승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탈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했던 지방호족 출신이다. 나말려초 선종 승려 30인 정도의 비문이 전하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김씨이다. 이 중 왕도 출신이 아닌 경우는 6두품 이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내외 정세와 당의 폐불 사태
한편 당에서는 무종 시기 폐불 사태가 전개되었다. 845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부적절한 방법으로 승니가 된 자를 환속시키는 정도였으며 그것은 늘 해오던 조처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845년 이후 도교에 심취한 무종이 도사들의 배불론에 기울어지면서 과격한 조치를 시행하였다. 50세 이하 승니를 환속시킴과 더불어 전국에 존속시킬 사원의 개소와 승니의 정원을 규정하였다. 그 결과 전체 승니의 99%가 환속되었고 훼철된 사원은 대사가 4,600개 소, 난야 등 규모가 작은 것은 4만개 소였다. 외국승 역시 모두 추방되었는데 엄격한 감시와 통제하에 미리 정해진 노선에 따라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종 출항지는 등주였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신라 선종이 갖는 무위의 종취와 그 사회적 기능, 그리고 선승들의 활동에 따른 선종의 특성까지도 정리하였다. 선종을 통한 신라 사회의 안정을 바라고 있다는 경명왕은 왕의 입장에서 선사가 국왕을 대신하여 혼란과 외도를 승복시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

선종 사원은 대집단을 수용한 만큼 사원이 자리 잡은 곳에 경계 표시를 하였다. 그 경계의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배타적 사원 공간으로서 설치되었을 것이다.

승려의 인맥인 법계를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영당(影堂)’을 중요 시설로 삼았다. 또 선사들의 승탑과 비문의 건립이 유행한 특징이 있다. 곧 이들을 ‘조사’로 우대하여 그 죽음을 예우한 것이다. 승탑의 제작에는 공장이 참여한 점과 그 예술성으로 보아 왕실의 지원이 뒷받침되었음이 짐작된다.

비의 건립은 신라 왕실과의 돈독한 관계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사원의 존재와 영속성을 보장 받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저작권자 © 국제i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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