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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대첩... 그 치열했던 70년전 그날을 기억하며...

기사승인 2020.09.09  14: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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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영천호국원 현충과 손준호 주무관 ⓒ국제i저널

유구한 우리 역사에 하나의 비극으로 남아있는 6·25전쟁. 그 1,129일간의 기록 중에 수많은 전투와 작전이 있었겠지만, 6·25전쟁사를 논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우리 지역의 영천지구 전투-영천대첩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걸로 생각이 된다.

전쟁 초기 북한은 우리 군엔 단 한 대도 없었던 전차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남으로 남으로 진격을 거듭하였고, 치열한 지연전을 거듭하면서 철수하였던 우리 국군과 UN군은 그해 8월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방어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전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중 다부동 방면 돌파에 실패한 북한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낙동강 방어선의 유일한 보급로였던 영천으로 공격방향을 바꾸게 된다.

만약 영천이 함락되면 아군의 조직이 분리되어 결과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나아가 부산까지 상실하게 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고 영천이 적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UN군은 전쟁에서 철수하고, 미국 정부에서는 남태평양의 서사모아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천대첩은 제8사단을 주축으로 국군과 미군과 합세하여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5사단을 비롯한 주공 부대(적의 주력을 치는 주력 부대)를 상대로 1950년 9월 4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치열한 공방을 거듭한 끝에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켜 승리를 거둠으로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9월 16일 국군과 UN군의 총반격 작전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이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승리를 ‘영천대첩’ 이라 칭하여 그 전공을 높이 찬양하였고, 후일 김일성조차 영천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라고 한다.

매년 9월 13일 국립영천호국원 경내에 조성된 영천대첩비에서 당시 참전하신 호국영웅을 모시고 ‘영천대첩 기념행사’가 거행되고 있지만 올해는 안타깝게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행사가 취소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날의 포성이 사라진지 70년이 지난 지금.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을까 만은 제대로된 보급이나 군복도 없이 누군가가 사용했던 피 묻은 총을 받아 탄창을 장전하는 방법을 배우고 총 몇 번 쏴보고 바로 전장으로 투입되셨다던, 70년이 지나도 자기 군번과 입대일자를 생생히 기억하시던, 전투 무용담을 쩌렁쩌렁하게 들려주시던 참전용사 어르신들의 육성이 아직 생생하다.

‘사라지는 것 보다 잊혀지는 게 더 두렵다’는 말이 있듯이 목숨을 바쳐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주신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다음 세대에도 또 그 다음 세대에도 그 의미가 잘 전해졌으면 한다.

김도희 기자 iij@iij.co.kr

<저작권자 © 국제i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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